창작물에 대하여2020. 10. 17. 13:16

RAPP(전러시아 프롤레탈리아 작가협회, Rossiyskaya Assotsiatsiya Proletarskikh Pisateley)는 소련에서 존재했던 단체이다.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사회민주노동당(후일의 공산당)은 도시 노동자와 군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농촌에서는 사회혁명당이 우세했다. 공산당의 집단농장화를 농민들은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제헌의회에서 사회혁명당이 과반을 차지하자 레닌은 부르주아의 의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며 의회를 해산한뒤 소비에트의 볼셰비키들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공산당 민주집중제를 실시한다.

 

비밀경찰 체카(반혁명 공작 대처를 위한 특별국가위원회)가 반대파를 숙청하고 파업을 일으킨 주민들을 강물에 던져버린다. KGB의 전신인 체카는 고문도 서슴치 않았다. 니콜라이 일가는 권총탄을 맞고 황야에 암매장된다. 소비에트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맨셰비키와 온건 사회주의자들 또한 계급의 적이라 낙인찍혀 숙청된다. 혁명 이전 차르의 비밀경찰은 재판없이 연간 수십명을 죽였다. 1918~1919년 체카는 수만명을 학살했다.

 

반혁명의 공포에 쫓기는 볼셰비키들은 이내 출판, 즉 문학과 연극등 창작물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작이다.

 

 

 

여기에 전러시아 프롤레탈리아 작가협회가 중심이 된다. 아베르바흐가 진두지휘하는 이 단체는 노동자의 이름아래 모든 출판물을 검열한다. 모든 창작물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요된다. 톨스토이와 도프도예스키의 소설은 봉건시대의 잔재로 격하된다. 새시대의 걸맞는 노동자의 자세를 제시하고, 위대한 소비에트 공산당의 혁명을 찬양하는 작품만이 살아남았다. 우매한 민중을 계몽시키는 것이 예술의 의무였다. 모든 창작은 당 중앙위원회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에 있어서 올바르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묘사할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 그때 예술적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근로자를 사회주의정신에 있어서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시키는 과제와 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네이버 백과사전 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잡다한 수식어를 다 걷어내고 보자면 간단하다. 예술에는 그 자체를 뛰어넘는 사회적 의무가 존재한다. 고통받는 노동계급과 위대한 혁명을 위해 예술가들은 혁명에 봉사할 의무가 존재한다. 봉건사회와 부르주아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혁명을 이끄는 공산당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모든 창작물의 주를 이루어야 한다. 예술로서 민중을 세뇌 계몽해야 한다. 창작에 무지한 볼셰비키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며 위대한 저작들이라고 떠들어 댔다. 전체주의자들이 약자의 이름으로 예술에 통일성을 강요했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한게 으레 그렇듯 소련 문학계가 침체하는 결과를 낳는다.

 

 

 

 

어린시절 도프도예스키의 소설을 읽고 감명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2차대전 참전한 소련 여군들의 인터뷰를 엮어 책으로 만든다. 이를 출판하러 공산당에 가져가지만 반려된다. 이유가 황당했는데,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혁명을 위해 싸우는 위대한 공산당 간부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웃긴 건 현대 신좌파 페미니스트들은 이 책을 역사속 잊혀진 여성들을 조명한 위대한 소설이라 찬양한다. 같은걸 봐도 기준이 제멋대로이다. 더 어이없는건 작가는 딱히 페미니즘적인 생각으로 이 책을 쓰지 않았고, 러시아 공산당은 페미니즘의 수호자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 대혁명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휘두르는 홍위병들은 구시대적이고 봉건적인 잔재들을 쓸어 없앤다며 소설, 애니메이션, 영화, 경극을 파괴하고 공자묘를 도굴한다. 애니메이션 선진국이었던 중국은 몰락하고 일본이 동아시아 애니메이션을 선도한다. 마오의 아내 장칭이 앞장서 공격한 경극은 아예 초토화된다. 중국은 아직까지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은 도서 정리 사업으로 불건전한 작가들을 숙청하고 작품들을 불태운다. 노비를 부린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은 봉건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비판받는다. 남은것은 오직 조선린민의 수호자, 민족의 아바이, 혁명의 수뇌부이신 김일성 수령동지 뿐이었다.  같은 조선의 후예인 한국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북한과 공산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80년대 운동권들은 한국영화들이 지나치게 부르주아적이고 서구제국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며 비판한다. 예술은 응당 사회적 약자인 프롤레탈리아 노동계급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들이 정확히 무슨의미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예시를 들어보겠다.

 

 

 

 

 

 

디즈니 영화 "겨울왕국"의 사례를 보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엘사와 안나는 아렌델 왕국의 왕족이다. 봉건사회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두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둘의 입장만을 대변한다. 엘사는 선천적인 얼음마법으로 고통받고 안나는 사랑의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눈을 돌려보자. 아렌델 왕국에는 수많은 주민들이 살고있다. 과거 귀족들의 압제와 착취속에 고통받았던 봉건 농노들이다. 이들의 아픔과 고통에 비하면 엘사의 어려움은 한낱 어리광에 불과할 것이다. 엘사가 기근의 굶주림을 겪었는가, 아니면 신분사회의 유리장벽을 마주했는가. 여기서 이 영화가 프롤레탈리아를 외면하고 푸른피의 입장을 대변하는 구시대적인 부르주아 영화라는것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아렌델의 주민들은 왕족들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따른다. 얼음장수 크리스토프는 안나를 도와주는 영화의 남주인공 포지션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볼때 이는 노동계급에 대한 후안무치한 모욕이자 미국자본인 디즈니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보여준다. 중세 평민들이 왕과 귀족들을 진심으로 존경했을까. 권력을 가진 귀족들에게 평민들이 감히 맞설수 있었을까. 압제에 시달렸던 과거 평민들은 귀족들의 칼과 무력앞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실존하지 않는 영화 속 유토피아를 보고있자면 씁쓸할 뿐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아렌델의 주민들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안나와 엘사는 궁궐에서 살지만 평민들은 초라한 나무집에서 살아간다. 둘의 차이는 오직 신분뿐이다. 누구도 그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귀여운 캐릭터와 화려한 그래픽으로 포장한 겨울왕국은 신분제와 봉건사회를 미화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프와 스벤, 올라프를 표현해낸 방식 또한 제작진의 부르주아적 시각을 드러낸다. 이들은 철저한 엑스트라이며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 포지션에 머무른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다른 방식은 없었는가. 노동력을 타의적으로 착취당하는 가축 스벤과 온몸이 조각나도 여왕을 돕는 올라프.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주연들. 마치 과거 집안 하인들을 착취하며 한줌 자비를 베푼뒤 자신이 자비롭다 으스대는 귀족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 영화가 가장 성공적인 디즈니 영화중 하나이며, 엘사가 수많은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다는것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어린 소녀들이 엘사의 얼음드레스를 입고 우쭐해한다. 그 소녀들은 대다수가 프롤레탈리아 계급이며, 평생 저런 귀족적인 드레스를 입을일이 없을 텐데도. 보다 노동친화적인 영화가 필요하다. 더 이상 신분제를 미화하는 부르주아의 영화는 필없다. 보다 혁명적인 영화, 주인공이 노동계급인 영화, 세계시민들의 연대와 해방을 위해.

 

 

 

 

.....대충 이런 주장이다.

 

써놓고 보니 더욱 개소리같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실제 운동권들이 했던 주장이 저런거다. 대학 도서관에서 학생 운동권의 얇은 책 한권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90년대 한국 영화를 비판하며 했던 주장이 정확히 저런거였다. 영화에 등장하는게 다 양반, 장군, 공주, 왕자들이라고. 왜 펑범한 농민이나 노동자를 등장시키지 않냐고. 내 기억에 그 책이 출판된 연도가 96년도였나 그랬다. 제목은 기억이 안나지만.

 

저 논리로 따지면 영화 기생충은 프롤레탈리아 계급을 모욕한 영화이다. 부유한 부르주아에 비해 프롤레탈리아 노동계급은 약자이고 기택 가족을 이용해 약자를 모욕한 기생충은 반프롤레탈리아적이다. 지하실의 오근세를 이용해 노동계급간의 갈등을 보여주었다는 것에서 더더욱 그렇다. 노동계급간의 분열을 초래하니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어떤가. 주인공 고애신은 사대부의 영애이다. 말할것도 없는 부르주아이며, 하인을 부린다는 점에서 더더욱 악질적이다. 유진초이는 천민이었으나 신분질서에 순응해 혁명대신 군인의 길을 택했고 무력으로 미국정부와 자본주의를 비호한다.  쿠도 히나는 호텔을 운용하는 부르주아 여성이다. 오직 구동매만이 하층계급이지만 그조차 신분질서에 순응하고 같은 노동계급을 박해한다. 그 칼끝은 부르주아 계급을 향했어야 옳다.

 

영화가 무슨내용이고 작가가 얼마나 애정을 담아냈으며 개연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압제받는 노동계급, 그리고 혁명의 필요성과 공산주의의 위대함. 이 세가지를 얼마나 잘 담아내고 대중에게 전파하느냐만이 영화의 쓸모를 증명한다. 이 내용이 들어가지 않은 모든 창작물은 잠재적으로 부르주아적이거나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작품이다.

 

전체주의란 무엇인가. 파시즘을 설명할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개인에 우선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다를바 없었다. 계급은 개인에 우선한다. 작가의 표현의 자유따위 위대한 혁명앞에 무시되는것이다.

 

소련의 몰락과 함께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몰락한다. 소련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비판한 솔제니친은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는다. 미국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가 막대한 자본과 상업주의를 내세워 전세계를 휩쓸고, 자본의 그늘에서 다양한 작가주의 영화들이 자리를 잡았다. 더이상 검열과 전체주의의 광기가 창작물을 억압할 일은 없을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망령이 다시 돌아왔다. 공산주의가 노동자의 탈을 썼다면 이번에는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의 탈을 쓰고 나타났다. 불편할 자유라는 구호아래 창작물을 짓밟는 저들의 행태는 과거 볼셰비키들과 다를바 없다. 저들은 인권과 개인의 권리를 외치지만 실상은 여성과 소수자라는 집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립할 수 없는 집단주의자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자신들이 허락한 어항속의 자유이며 페미니스트들의 혐오에 대한 혐오는 자신들이 불편하거나 불쾌한 모든 것들이다. 저들은 말도안되는 주관적 기준으로 남의 창작물을 혐오로 규정한다. 패션왕의 봉지은이 아랫배에 조개를 올려놓고 깼다고? 그게 왜 여성혐오인가. 해산물 혐오일 수도 있지. 동물단체들은 뭐하고 있는가. 동물혐오이니 네이버 본사에 항의해야 한다. 

 

 

뭐 기안 84가 이상한짓 하는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신좌파들에게 혐오스럽지 않은 작품은 일정이상의 여성/동성애자/유색인종이 등장하고, 불평등과 혐오에 대항한 소수자가 압제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는 주제를 가지고, 우매한 대중에게 페미니즘과 신좌파의 위대함을 얼마나 잘 알려주는가, 대충 이런거다. 주어만 바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이들이 창작물을 검열할 권리를 가지면 일어날 결과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똑같을 것이다.

 

 

누군가가 불편하다고 창작물을 억압할 권리를 준다면 그 권리는 모든 대중이 공평하게 나눠갖지 않으며, 결코 공정하게 행사되지도 않는다. 일반 대중은 창작물을 일일히 찾아보고 판단할 시간을 갖지 않으며 그런데 별 관심도 없다. 소수의 광신도들, 소위 "꾼"들이 집단을 이루고 여론을 선동하면 그곳에 쉽게 휩쓸린다. 즉 실질적으로는 소수 권력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창작계 전체를 검열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정치인들과 연관이 있고,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창작물들이 이리저리 통제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표현의 자유는 당신이 남을 비판할 자유가 아니다.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자들이 당신을 욕하면 당신은 그에 대해 비판하고 반박할 권리만 있을뿐 그 발언을 틀어막는 것은 당신의 자유를 권력자들에게 저당잡히는것과 다를바 없다. 표현의 자유는 당신이 가장 증오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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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합리적으로 살자
정치/국내정치2020. 10. 11. 15:33

 

작년 출산율은 0.9 였으며, 올해 코로나 여파로 0.8 이하로 떨어질 전망이다. 한국의 파멸적인 초저출산이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한번 정리해보자.

 

 

 

 

일단 사회보험, 복지제도는 그냥 붕괴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50대 이하, 특히 비혼이거나 딩크족이라면 30년뒤 노인연금이나 의료보험등의 사회복지는 기대하지 않는게 좋을것이다. 사람은 나이들수록 어딘가 아프게 될 확률이 높고, 사회적 약자가 되어가므로 복지제도의 수혜를 받게 된다. 따라서 복지는, 특히 의료와 연금제도는 내가 젊을때 나이든 사람들을 부양하고, 나이들어서 젊은 세대에서 부양받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출산으로 미래세대의 숫자가 지나치게 적고, 이민으로도 해결할 단계를 지났으므로 현재의 복지체계가 유지되는것은 불가능하다. 안한다는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선진국중에서 가장 가난한 노인들이 아마 한국 노인들일 것이다. 우선 현대 한국 노인들은 과거 경제개발기 생활하여 재산을 모을 사정이 안되었고, 대가족이 붕괴하고 물질주의-집단이기주의가 유교사상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자식에게 충분히 부양받지 못한다. 부양하는 집도 있지만, 대체로 그렇지 않다. 그나마 어느정도 기능하던 노인복지체계가 완전 붕괴하고, 고령화가 가속되며 노인빈곤율은 더더욱 치솟을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노인들이 모여사는 교외의 빈민가가 생겨날 것이고, 비싼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고통받는 노인들이 많아질 것이다. 노숙인구 또한 대거 증가한다. 저출산을 하루이틀내에 해결할수 없으므로 이런 상황이 30년 정도는 지속되게 될것이다. 딱히 생명을 중시하지 않고 물질주의적인 한국인들의 정서상, 2040년 즈음에는 안락사가 적극 권장될 것으로 보인다. 적으면 약 500만, 많으면 1000만 이상이 안락사를 선택할것이다. 

 

 

 

 

 

 

세금 부담 또한 치솟을 것이다. 노인 인구가 많아진다고 곧바로 복지체제를 포기할 리가 없다. 또한 치안, 군대, 기본적인 사회 인프라는 유지해야 하기때문에 점점 적어지는 생산가능 인구에게 모든 부담이 전가된다. 한국은 저소득층에게 세금을 거의 부과하지 않는 대신 고소득층의 간접세로 부족한 세수를 충당하는 국가이다. 이 세제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으므로 미래에는 저소득층에게도 세금부담이 높아질 것이다. 특히, 장기적으로 아이를 낳을 가망이 없는 나이든 딩크족과, 비혼자들에게는 사실상의 싱글세가 부과된다. 이들은 복지에서도 노인에 뒤이은 최하위순위로 밀려나게 된다.

 

만일 장기적으로 딩크족이나 독신으로 살계획이라면, 미리미리 준비를 단단히 해두는것이 좋다. 미래의 한국은 결코 현재와 같을수 없다.

 

 

 

 

 

 

경제가 침체된다. 강인공지능이 30년내에 출현할 가능성은 낮고, 산업혁명때도 그러했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은 지수적이 아니라 선형적이다. 급격한 인구 감소를 기술발전으로 보완할 수 없을텐데, 인구는 일정부분 미래의 경제 성장률이다.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경제활동의 주체이며, 잠재적인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이다. 한국은 수출중심국가이지만 상당수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내수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대기업들조차 국내시장의 뒷받침이 없으면 수출에 곤란함을 겪는다. 그 내수시장이 쪼그라들 것이므로 미래의 한국은 잃어버린 30년, 어쩌면 그 이상을 겪게 된다.

 

젊은이들은 취업하기 어려울 것이고, 빈부격차는 점점 심화되고, 기업들은 해외로 도피한다. 재능있는 젊은이들은 미래를 찾아 해외로 이민하게 된다. 질좋은 일자리는 점점 사라진다.

 

 

 

 

 

 

 

줄어든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 이민자들이 대거 들어올것이다. 한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고 저출산의 심각성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중이다. 결국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될때, 많은 이민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받게 될것인데, 어마어마한 혼란과 고통이 있을것이다. 

 

이민자들은 재산이 많지 않으므로 가난한 동네로 몰려들게 되고, 한국인들은 치안악화와 인종갈등을 피해 다른 동네로 떠나게 된다. 교외의 슬럼가들에는 이민자들이 모여 살게 된다. 필연적으로 치안이 악화된다. 경찰조차 들어가기 꺼리는 무법지대가 생겨날 것이다. 이는 유럽이나 미국등 이민자들이 많은 국가에서 이미 생겨나는 현상이다. 한국은 더 무분별하게 이민자들을 받게 될 것이고, 미래 국가 상황이 좋지 않으므로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된다.

 

LA폭동같은 인종폭동, 인종 갈등과 특정 인종으로 이루어진 갱단등도 생겨나게 되고, 그에 대한 반발로 극우파가 부상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병력자원이 급감할 것인데, 이민자들로만 군대를 채울 수는 없다. 반란이나 내전의 위험성을 교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정기간은 남성들의 군복무 기간을 늘리는것으로 대처하겠으나 2030년 이후에는 그것조차 한계에 부딪힐 것이므로, 끝내는 여성 징병제를 시행하게 된다. 마침 안티페미니즘이 부상할 시기와 맞물린다. 미래의 여성들은 50~70% 가량이 2년에서 3년간 군복무를 하게 될 것이다.

 

 

 

 

 

 

세대갈등이 증가한다.

 

젊은층은, 특히 미래의 젊은이들은 막대한 세금부담과 낮은 취업률, 침체되고 멸망해가는 국가를 체감하며 절망하게 된다. 그들은 살아갈 날이 많으므로 이렇게 된 원인을 물어볼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인데, 자신들보다 부유했던 현 세대가 개인의 선택과 행복을 위해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말하면 무척이나 공감해 줄 것이다.

 

미래 노인들은 극단적인 빈곤율에 시달릴 것이고, 생존을 위해 증세와 복지 확대를 주장하겠지만, 젊은 세대가 그에 동의하겠는가?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며 현대와 같은 삶의 질을 누리지 못할 미래 젊은세대는 복지 축소와 국민연금 폐지를 외치게 된다. 현대의 20~30대는 그때가 되면 중년이 되어있을 것인데, 아마 페미니즘-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여성들은 나이든 노인들에 동조할 것이고, 안티페미니즘-경제적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남성들은 젊은층과 함께할 것이다.

 

부가적으로, 미래 아이를 낳지 않은 딩크족-비혼 독신자들에 대한 시선은 극히 좋지 않을 확률이 높다. 사회 문제의 대부분이 저출산으로 인해 초래되었는데 아이를 낳지 않은 자들에 대한 시선이 좋겠는가. 현재의 병역기피자와 비슷한 시선을 받게 된다.

 

 

 

민주주의는 높은 확률로 붕괴하고 한국에는 사실상의 독재국가가 들어선다. 현대 많은 선진국들도 겪고 있는 문제이지만, 노인층이 점점 많아지면서 1인1표의 보통선거제로는 젊은층보다 노인층의 영향력이 높아진다. 정치인들도 당연히 노인들을 위주로 한 공약을 내놓고, 국가 정책 또한 그렇게 된다. 젊은층은 불만이 쌓일 것이므로 자신들을 대변하고 노인들의 복지혜택을 축소하는 정치인에 표를 던지겠지만, 머릿수 부족으로 패배할 것이다. 몇차례 패배를 겪고, 더이상 민주주의가 젊은이들의 이익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젊은세대들은 민주정 폐지를 주장하게 된다. 

 

마침 군대는 젊은 남성들로 구성되고, 미래 예비군이 될 40대 남성들 또한 안티페미니즘 성향과 함께 복지확대에 부정적일 현재의 2030 남성들이다. 노인들의 대한 예의와 배려는 사회 윤리와 문화에서 비롯되지만, 사람이 살기 힘들면 가장 먼저 도덕을 갉아먹는다. 러시아 혁명은 군대의 파업에서 시작되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우리는 미래 보통선거제 폐지와 헌법 철폐를 요구하며 거리로 뛰쳐나올 수십만의 무장군인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전체주의 독재국가가 들어설 경우, 강력한 출산"강제"정책을 시행하게 될 것이다. 차우세스쿠식 인구정책이 한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애 안낳으면 감옥보내고, 독신자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리고, 낙태와 피임을 금지한다. 싱글라이프에 대한 환상을 자극하는 모든 창작물과 방송 프로그램을 검열한다. 미래에는 인공자궁도 나오니 그걸로 아기공장 만드는것도 한 방법이겠다. 개인의 자유? 한국의 징병제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서 시행되는가. 기술의 발달은 출산 강제정책을 가능하게 만든다. 필요하고, 여론이 뒷받침되면, 시행된다. 서글프게도.

 

그렇지 않더라도, 미래 한국의 정부들은 어떻게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싱글세, 부모보험, 출산에 대한 막대한 혜택... 여기에는 혜택과 패널티가 병행될 것이다.

 

 

 

 

여성 세대갈등이 심각해 진다. 미래 여성들의 삶은 그리 좋지 못할 것이다. 현대 젊은 여성들은 (효과가 의심스러운)여성우대 정책을 누리며 법적, 문화적으로 젊은 남성들보다 우위에 서있지만, 미래에는 그것이 불가능해 진다. 페미니즘은 남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딫쳐 무너질 테고, 저출산이 심화되면 한국의 비혼주의 래디컬 페미니즘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

 

병역의 부담은 남성이 더 지지만, 출산의 부담은 여성이 더 크다. 아무리 문화적, 제도적으로 남녀 평등해도 생물학적으로 그렇다. 미래 여성들은 군대에 끌려가고, 페미니즘 붕괴의 영향으로 제도적으로 차별받는 사회에서 살게 되고, 성비 붕괴와 남성의 초식화로 연애와 결혼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젊은 여성들은 범죄의 대상이 되므로, 치안악화의 피해를 가장 많이 겪는다. 또한 출산과 결혼이 반쯤 강제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당연히 별로 행복한 상황이 아니다. 그리고 미래 여성들은 그 원인을 현재의 2030대 여성들에게서 찾게 될 것이다. 현재 많은 2030여성들의 래디컬 페미니즘은 제 3자의 시선에서 보게 될때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고, 저출산의 문제를 몸으로 겪는 미래 여성들이 보기에 현대 여성들의 비혼주의 페미니즘은 심하게 말해서 제정신이 아닌것처럼 보일것이다. 

 

더군다나 안티페미니즘 성향을 띈 현대의 2030 남성들은 미래 젊은 세대들의 의견에 상대적으로 더 동의해 주겠지만, 일본 아라포 세대의 결말을 맞게 될 2030 여성들은 그게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미래 여성들은 현대 586남성-젊은 남성세대의 갈등을 몇배로 증폭해서 겪게 될 것이다. 

 

 

 

 

 

위와 같은 시나리오가 현실화될지는 알 수 없다. 만일 2050년 이전에 완벽한 안드로이드가 개발되거나, 출산율이 다시 반등해서 1.5까지 올라가거나, 스카이넷이 개발된다면 위의 시나리오는 무시해도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경우, 거시적으로는 위와같은 흐름이 될것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Posted by 합리적으로 살자
창작물에 대하여2020. 10. 9. 19:41

201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문화예술계에 불어오는 바람이 하나 있다.

 

 

 

"정치적 올바름"

 

 

 

창작물의 정치적 올바름이란, 일반적으로 차별받거나 사회적 약자라고 여겨지는 정체성들이 창작물에서 일정 비중 이상을 차지해야 하며 조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정체성들은 동성애자, 여성, 유색인종, 젠더퀴어등을 뜻한다. 정치적으로 신좌파와 연관이 깊으며, 따라서 페미니즘, 환경운동, 채식주의, LGBT등과 궤를 같이한다. 전통적으로 문화예술계에는 좌파들이 많았으며, 곧 신좌파적 개념인 정치적 올바름 역시 창작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수많은 창작물들에서 이러한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캐릭터가 "여성"인것을 강조하고, 여성서사를 논하고.. 모든 직업마다 일정 비율로 유색인종을 집어넣고, 캐릭터중 몇몇이 갑자기 동성애자로 변하고.....

 

또한 기존에 존재하던 창작물들중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작품들에 대한 공격도 병행되었다. 특정 만화가 인종차별적이다, 특정 작가가 여성혐오적 발언을 했다, 특정 가사가 흑인을 모독했다....

 

 

 

이 파도는 할리우드를 휩쓸고 서구사회를 덮친뒤 마침내 한국에까지 밀어 닥쳤다.

 

많은 작가들은 정치적 올바름를 반영한 작품이야말로 새시대에 발맞춘 세련된 방식이라 생각하고, 거리낌없이 이를 수용한다. 사실 좀 더 과거로 돌려보자면, 이러한 소수자, 약자를(또는 그렇다 여겨지는) 조명하는 작품들은 깨어있고 세련된 작품이라 칭송받았다. 당차고 자주적인 여성캐릭터는 드물었기에 신선했고, 세련되었으며, 진보적인 작품이라 여겨졌다.

 

화이트워싱이 문제되던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 흑인 배우가 발붙이는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매카시즘의 광풍이 휩쓸던 1950년대 미국에서 조금이라도 "공산주의적"인 발언을 한 배우는 영화계에서 배제당했다. 2차대전 이후 문화예술계의 역사는 정치적 올바름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2010년대 이후 이 "정치적 올바름"이란것이 신좌파의 득세와 함께 거의 범람하다시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서사나 캐릭터, 개연성은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 중요한것은 의도이며, 정치적 올바름의 정의로움을 얼마나 잘 담아냈느냐가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작품이라기보다는 프로파간다의 방식이다.

 

가능한 많은 여성, 유색인종, 동성애자를 출연시키고, 정의와 도덕을 담아낸뒤 인종차별반대를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원론적으로는 옳다. 원론적으로는. 공산주의도 원론적으로는 옳은 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창작물이 재미없다거나 비판하는 목소리는 모두 차별과 혐오의 결과물이라 몰아붙이는 행태는, 뻔하디 뻔한 스토리와 개연성을 정치권력으로 덮으려는 얄팍함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전무한 상태로 독자를 조롱하는 오만함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심지어 추악하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보자. 작품성과는 별개로, 창작물에는 다양한 주제의식이 공존한다. 좌파들은 창작물에는 응당 소수자를 존중하는 주제의식이 들어가야 한다 주장한다. 피해의식 강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서사야말로 진정한 창작물의 극한이라 주장할 것이다. 지극히 편협한 시각이다. 고작 소수자 따위만이 창작물의 전부인가.

 

모든 창작물이 여성의 이야기를, 소수자의 이야기를 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그것을 하지 않았다고 열등한 창작물이 아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여성서사건(애초에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여성서사라는 개념 자체도 극도로 모호하지만) 인종차별 이야기건 그냥 주제중 하나이며 특별히 대접받아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주제의식의 유무나 종류 자체로는 어떠한 작품성도 유발되지 않는다. 그것이 전에 시도된 적 없는 신선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희소성이 있겠으나, 요즘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작품들이 부족하던가? 넘쳐나서 문제지.

 

 

 

 

시리아 내전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재민과 군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을때, 그것이 페미니즘 소설보다 열등한 작품이 되는가. 아프리카 소년병들의 이야기는? 세종대왕의 이야기나 문익점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냈을때 그 주제의식이 블랙팬서보다 못할까. 82년생 김지영보다 못할까.

 

소수자의 목소리만이 정의는 아니다. 전쟁도, 평화도, 범죄 수사도, 직업에 대한 존중과 가족애 역시 충분히 좋은 주제의식이다. 

 

아예 주제의식이 없는 작품들도 있지 않나. 순수하게 즐거움, 유머만을 목적으로 하는 만화들. 어떤 작가가 단순히 독자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작품을 만든다면, 표면적인 주제의식이 희박한 이 작품은 작품성이 떨어지게 되는가? 절대 아니다. 창작물의 다양성이란 특정 사상을 남에게 박아넣는 것이 아니다. 뭐가 되었던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다양성이다. 명량만화건 다큐멘터리건 동등하게 존중받는 것이(개인 취향은 별개로 하고서도) 평등이다. 주제의식 따위로 남의 창작물을 규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황당하게도 최근 많은 작가들, 작가 지망생들은 위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대학을 다녔던 내 경험으로는, 많은 학우들이 창작물의 정치적 올바름, 소수자 존중, 페미니즘적 시각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다. 예술계가 좌파 많은것도 알고, 저런 주제의식 쓴다고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단순히 PC적인 것을 넘어 배타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띄니 문제이다. 작가지망생들중 상당수가 트페미이고, 나머지도 대개 이들에 강하게 동조한다. 이들은 소수자를 위한 창작물 이외의 모든것들을 용납하지 않는다.(그 소수자의 정의 또한 자신들이 규정한다) 숫자의 폭력을 앞세워서. 반대파의 목소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묻혀버리기 일쑤이다. 걱정인 것은, 이들이 미래의 편집자이며, 플랫폼 담당자가 될것이고, 작가들도 이들중에서 나올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이 왜 이런 사상을 갖게 되었을까. 작가란 어떤 집단인가. 창작물의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감정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집단이다. 창작물은 감정의 언어이다. 이성의 언어를 쓰고 싶다면 논문을 써야한다. 

 

내 사견으로는, 그렇기에 작가들은 감성적이다. 감성적이라는게 유약하다거나 격정적이라는것이 아니다. 현실을 표현하는 대신 당위를 내세우고, 스토리 자체가 도덕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그러한 내용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것이다.

 

 

 

 

 

창작물의 주인공들을 생각해보자. 대개 어떠한 악이 존재하고, 주인공은 악과 싸우며 절망하고 고난을 겪으나 끝끝내 승리하고 보상을 누리는, 아주 간단한 서사를 가진다. 이 용사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이 나올까. 주인공이 노력끝에  그 결실을 맺고,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고, 누가 보기에도 죽어 마땅한 "악"을 처단하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영웅이 된다. 독자들은 이를 보며 감동을 받는다. 대부분의 창작물들은 그렇다. 배드엔딩이나 보다 현실적인 소재도 존재하나, 결국 독자들의 어떠한 감정 변화를 유도하는것은 마찬가지이다. 

 

시간의 상대성과 광속의 절대성을 설파하거나, 뉴턴 물리법칙의 한계를 지적하는 뭐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도 존재하지만, 그들 역시 캐릭터와 연출이라는 필터를 거치고, 창작물은 정보전달 측면에서는 순수 설명문에 못 미친다. 계속 말하지만, 창작물은 감정의 언어이다. 감정으로 독자를 설득한다.

 

이게 현대 신좌파적 정치적 올바름-페미니즘과 결합했을때 파멸적인 결과가 나타난다.

 

 

 

 

 

신좌파들은 누구인가. 페미니스트, LGBT,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 인권운동가.... 이들은 누구보다 감정적이며, 가장 소리높여 정의를 외친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받은 소수자를 위한다는 정의를 내세운다. 억압받고 소외받던 보잘것 없는 주인공(소수자들)이, 어떠한 계기(페미니즘,인권단체)로 부당함을 깨닫고, 악한 적과 싸워(차별주의자들), 혁명으로 적을 무찌르고 정의를 이룬다는, 창작물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기에 창작자들은 이 사상에 강하게 끌린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거나, 이들의 모순점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사로잡힐 것이다. 언뜻보기에 이 사상들은 문제가 없으므로, 소수의 극단적인 이들만 배제한다면(트페미등) 정의로운 사회(차별이 없는)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보인다.

 

현대 많은 창작자들은, 창작물에 다양한 인종을 의무적으로 집어넣고, 동성애자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녹여내려 노력한다. 소수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주제는 범람하다시피 한다. 억압받던 소수자가 깨달음을 얻고 차별주의자와 사회의 억압을 벗어 던지고 다른이들을 계몽시키는 내용은 이제 흔하기까지 하다.

 

좋다. 창작물에 대한 책임은 작가 개인에게 있고,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표현의 자유는 가능한 보장되어야 한다. 자기 만화나 소설에 어떤 주제의식을 넣고 어떤 캐릭터를 넣던 그건 작가 자신의 자유이다. 그에 대한 책임은 작가 개인에게 존재한다. 그것이 패널티일수도, 어드밴티지일수도 있다.

 

 

 

 

 

 

문제는 그를 넘어-그들에 동조하지 않는, 다시 말해 그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만화를 만드는 작가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이다. 어떤 작가들은 딱히 다양한 인종을 넣는데에 관심이 없고, 굳이 여성캐릭터를 자주적으로 만들지 않으며, 누군가는 동성애가 아닌 펑범한 이성애를 주제로 작품을 만든다. 그렇다면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가들이나 그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적극적으로 공격하며 배제하려 든다. "사회정의를 위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회 문제에 공정한 관심을 가지는가. 그들은 시리아 내전에 관심을 가졌는가? 아랍의 봄 이후 발생한 시리아 내전으로 수백만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돈바스 전쟁은 어떤가, 아프리카 군벌들의 문제는? 그곳에서는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따위가 아닌 직접적인 폭력과 차별들이 발생한다. 제 3세계의 비참함은 선진국의 상상을 초월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 관심을 가질수 있을까.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자들은 모두 비열한자들인가. 자신의 관심사를 남에게 강요하는 행태는 극좌적인 오만함일 뿐이다.

 

기억하기 바란다. 1990년대 한국의 만화검열을 주도한 단체는 YWCA였고, 기독교 페미니즘 성향을 띈 여성단체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웹툰을 공격하는 중이다.

 

 

 

2편에서 계속한다.

 

 

 

Posted by 합리적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