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물에 대하여2020. 10. 17. 13:16

RAPP(전러시아 프롤레탈리아 작가협회, Rossiyskaya Assotsiatsiya Proletarskikh Pisateley)는 소련에서 존재했던 단체이다.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사회민주노동당(후일의 공산당)은 도시 노동자와 군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농촌에서는 사회혁명당이 우세했다. 공산당의 집단농장화를 농민들은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제헌의회에서 사회혁명당이 과반을 차지하자 레닌은 부르주아의 의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며 의회를 해산한뒤 소비에트의 볼셰비키들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공산당 민주집중제를 실시한다.

 

비밀경찰 체카(반혁명 공작 대처를 위한 특별국가위원회)가 반대파를 숙청하고 파업을 일으킨 주민들을 강물에 던져버린다. KGB의 전신인 체카는 고문도 서슴치 않았다. 니콜라이 일가는 권총탄을 맞고 황야에 암매장된다. 소비에트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맨셰비키와 온건 사회주의자들 또한 계급의 적이라 낙인찍혀 숙청된다. 혁명 이전 차르의 비밀경찰은 재판없이 연간 수십명을 죽였다. 1918~1919년 체카는 수만명을 학살했다.

 

반혁명의 공포에 쫓기는 볼셰비키들은 이내 출판, 즉 문학과 연극등 창작물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작이다.

 

 

 

여기에 전러시아 프롤레탈리아 작가협회가 중심이 된다. 아베르바흐가 진두지휘하는 이 단체는 노동자의 이름아래 모든 출판물을 검열한다. 모든 창작물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요된다. 톨스토이와 도프도예스키의 소설은 봉건시대의 잔재로 격하된다. 새시대의 걸맞는 노동자의 자세를 제시하고, 위대한 소비에트 공산당의 혁명을 찬양하는 작품만이 살아남았다. 우매한 민중을 계몽시키는 것이 예술의 의무였다. 모든 창작은 당 중앙위원회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에 있어서 올바르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묘사할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 그때 예술적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근로자를 사회주의정신에 있어서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시키는 과제와 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네이버 백과사전 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잡다한 수식어를 다 걷어내고 보자면 간단하다. 예술에는 그 자체를 뛰어넘는 사회적 의무가 존재한다. 고통받는 노동계급과 위대한 혁명을 위해 예술가들은 혁명에 봉사할 의무가 존재한다. 봉건사회와 부르주아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혁명을 이끄는 공산당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모든 창작물의 주를 이루어야 한다. 예술로서 민중을 세뇌 계몽해야 한다. 창작에 무지한 볼셰비키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며 위대한 저작들이라고 떠들어 댔다. 전체주의자들이 약자의 이름으로 예술에 통일성을 강요했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한게 으레 그렇듯 소련 문학계가 침체하는 결과를 낳는다.

 

 

 

 

어린시절 도프도예스키의 소설을 읽고 감명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2차대전 참전한 소련 여군들의 인터뷰를 엮어 책으로 만든다. 이를 출판하러 공산당에 가져가지만 반려된다. 이유가 황당했는데,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혁명을 위해 싸우는 위대한 공산당 간부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웃긴 건 현대 신좌파 페미니스트들은 이 책을 역사속 잊혀진 여성들을 조명한 위대한 소설이라 찬양한다. 같은걸 봐도 기준이 제멋대로이다. 더 어이없는건 작가는 딱히 페미니즘적인 생각으로 이 책을 쓰지 않았고, 러시아 공산당은 페미니즘의 수호자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 대혁명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휘두르는 홍위병들은 구시대적이고 봉건적인 잔재들을 쓸어 없앤다며 소설, 애니메이션, 영화, 경극을 파괴하고 공자묘를 도굴한다. 애니메이션 선진국이었던 중국은 몰락하고 일본이 동아시아 애니메이션을 선도한다. 마오의 아내 장칭이 앞장서 공격한 경극은 아예 초토화된다. 중국은 아직까지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은 도서 정리 사업으로 불건전한 작가들을 숙청하고 작품들을 불태운다. 노비를 부린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은 봉건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비판받는다. 남은것은 오직 조선린민의 수호자, 민족의 아바이, 혁명의 수뇌부이신 김일성 수령동지 뿐이었다.  같은 조선의 후예인 한국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북한과 공산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80년대 운동권들은 한국영화들이 지나치게 부르주아적이고 서구제국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며 비판한다. 예술은 응당 사회적 약자인 프롤레탈리아 노동계급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들이 정확히 무슨의미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예시를 들어보겠다.

 

 

 

 

 

 

디즈니 영화 "겨울왕국"의 사례를 보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엘사와 안나는 아렌델 왕국의 왕족이다. 봉건사회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두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둘의 입장만을 대변한다. 엘사는 선천적인 얼음마법으로 고통받고 안나는 사랑의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눈을 돌려보자. 아렌델 왕국에는 수많은 주민들이 살고있다. 과거 귀족들의 압제와 착취속에 고통받았던 봉건 농노들이다. 이들의 아픔과 고통에 비하면 엘사의 어려움은 한낱 어리광에 불과할 것이다. 엘사가 기근의 굶주림을 겪었는가, 아니면 신분사회의 유리장벽을 마주했는가. 여기서 이 영화가 프롤레탈리아를 외면하고 푸른피의 입장을 대변하는 구시대적인 부르주아 영화라는것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아렌델의 주민들은 왕족들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따른다. 얼음장수 크리스토프는 안나를 도와주는 영화의 남주인공 포지션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볼때 이는 노동계급에 대한 후안무치한 모욕이자 미국자본인 디즈니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보여준다. 중세 평민들이 왕과 귀족들을 진심으로 존경했을까. 권력을 가진 귀족들에게 평민들이 감히 맞설수 있었을까. 압제에 시달렸던 과거 평민들은 귀족들의 칼과 무력앞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실존하지 않는 영화 속 유토피아를 보고있자면 씁쓸할 뿐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아렌델의 주민들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안나와 엘사는 궁궐에서 살지만 평민들은 초라한 나무집에서 살아간다. 둘의 차이는 오직 신분뿐이다. 누구도 그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귀여운 캐릭터와 화려한 그래픽으로 포장한 겨울왕국은 신분제와 봉건사회를 미화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프와 스벤, 올라프를 표현해낸 방식 또한 제작진의 부르주아적 시각을 드러낸다. 이들은 철저한 엑스트라이며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 포지션에 머무른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다른 방식은 없었는가. 노동력을 타의적으로 착취당하는 가축 스벤과 온몸이 조각나도 여왕을 돕는 올라프.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주연들. 마치 과거 집안 하인들을 착취하며 한줌 자비를 베푼뒤 자신이 자비롭다 으스대는 귀족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 영화가 가장 성공적인 디즈니 영화중 하나이며, 엘사가 수많은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다는것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어린 소녀들이 엘사의 얼음드레스를 입고 우쭐해한다. 그 소녀들은 대다수가 프롤레탈리아 계급이며, 평생 저런 귀족적인 드레스를 입을일이 없을 텐데도. 보다 노동친화적인 영화가 필요하다. 더 이상 신분제를 미화하는 부르주아의 영화는 필없다. 보다 혁명적인 영화, 주인공이 노동계급인 영화, 세계시민들의 연대와 해방을 위해.

 

 

 

 

.....대충 이런 주장이다.

 

써놓고 보니 더욱 개소리같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실제 운동권들이 했던 주장이 저런거다. 대학 도서관에서 학생 운동권의 얇은 책 한권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90년대 한국 영화를 비판하며 했던 주장이 정확히 저런거였다. 영화에 등장하는게 다 양반, 장군, 공주, 왕자들이라고. 왜 펑범한 농민이나 노동자를 등장시키지 않냐고. 내 기억에 그 책이 출판된 연도가 96년도였나 그랬다. 제목은 기억이 안나지만.

 

저 논리로 따지면 영화 기생충은 프롤레탈리아 계급을 모욕한 영화이다. 부유한 부르주아에 비해 프롤레탈리아 노동계급은 약자이고 기택 가족을 이용해 약자를 모욕한 기생충은 반프롤레탈리아적이다. 지하실의 오근세를 이용해 노동계급간의 갈등을 보여주었다는 것에서 더더욱 그렇다. 노동계급간의 분열을 초래하니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어떤가. 주인공 고애신은 사대부의 영애이다. 말할것도 없는 부르주아이며, 하인을 부린다는 점에서 더더욱 악질적이다. 유진초이는 천민이었으나 신분질서에 순응해 혁명대신 군인의 길을 택했고 무력으로 미국정부와 자본주의를 비호한다.  쿠도 히나는 호텔을 운용하는 부르주아 여성이다. 오직 구동매만이 하층계급이지만 그조차 신분질서에 순응하고 같은 노동계급을 박해한다. 그 칼끝은 부르주아 계급을 향했어야 옳다.

 

영화가 무슨내용이고 작가가 얼마나 애정을 담아냈으며 개연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압제받는 노동계급, 그리고 혁명의 필요성과 공산주의의 위대함. 이 세가지를 얼마나 잘 담아내고 대중에게 전파하느냐만이 영화의 쓸모를 증명한다. 이 내용이 들어가지 않은 모든 창작물은 잠재적으로 부르주아적이거나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작품이다.

 

전체주의란 무엇인가. 파시즘을 설명할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개인에 우선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다를바 없었다. 계급은 개인에 우선한다. 작가의 표현의 자유따위 위대한 혁명앞에 무시되는것이다.

 

소련의 몰락과 함께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몰락한다. 소련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비판한 솔제니친은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는다. 미국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가 막대한 자본과 상업주의를 내세워 전세계를 휩쓸고, 자본의 그늘에서 다양한 작가주의 영화들이 자리를 잡았다. 더이상 검열과 전체주의의 광기가 창작물을 억압할 일은 없을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망령이 다시 돌아왔다. 공산주의가 노동자의 탈을 썼다면 이번에는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의 탈을 쓰고 나타났다. 불편할 자유라는 구호아래 창작물을 짓밟는 저들의 행태는 과거 볼셰비키들과 다를바 없다. 저들은 인권과 개인의 권리를 외치지만 실상은 여성과 소수자라는 집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립할 수 없는 집단주의자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자신들이 허락한 어항속의 자유이며 페미니스트들의 혐오에 대한 혐오는 자신들이 불편하거나 불쾌한 모든 것들이다. 저들은 말도안되는 주관적 기준으로 남의 창작물을 혐오로 규정한다. 패션왕의 봉지은이 아랫배에 조개를 올려놓고 깼다고? 그게 왜 여성혐오인가. 해산물 혐오일 수도 있지. 동물단체들은 뭐하고 있는가. 동물혐오이니 네이버 본사에 항의해야 한다. 

 

 

뭐 기안 84가 이상한짓 하는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신좌파들에게 혐오스럽지 않은 작품은 일정이상의 여성/동성애자/유색인종이 등장하고, 불평등과 혐오에 대항한 소수자가 압제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는 주제를 가지고, 우매한 대중에게 페미니즘과 신좌파의 위대함을 얼마나 잘 알려주는가, 대충 이런거다. 주어만 바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이들이 창작물을 검열할 권리를 가지면 일어날 결과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똑같을 것이다.

 

 

누군가가 불편하다고 창작물을 억압할 권리를 준다면 그 권리는 모든 대중이 공평하게 나눠갖지 않으며, 결코 공정하게 행사되지도 않는다. 일반 대중은 창작물을 일일히 찾아보고 판단할 시간을 갖지 않으며 그런데 별 관심도 없다. 소수의 광신도들, 소위 "꾼"들이 집단을 이루고 여론을 선동하면 그곳에 쉽게 휩쓸린다. 즉 실질적으로는 소수 권력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창작계 전체를 검열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정치인들과 연관이 있고,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창작물들이 이리저리 통제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표현의 자유는 당신이 남을 비판할 자유가 아니다.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자들이 당신을 욕하면 당신은 그에 대해 비판하고 반박할 권리만 있을뿐 그 발언을 틀어막는 것은 당신의 자유를 권력자들에게 저당잡히는것과 다를바 없다. 표현의 자유는 당신이 가장 증오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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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합리적으로 살자
정치/국내정치2020. 9. 3. 22:27

저번글에서는 부족하게나마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해 읊어 보았다.

이번에는 민주주의의 적, 고대 그리스의 참주부터 현대의 포퓰리즘에 이르기까지 유래깊은 현상,

자유와 민주주의의 적 "독재"에 대해 정의해보고자 한다.

 

독재(獨裁)

 

 

 

1) 독재란 현상이다. 특정한 정치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들어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위시한 삼사의 견제에 더해 온갖 유교적 의무를 덕지덕지 진 조선의 국왕과, 대외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현대의 독재국가들(북한, 베네수엘라, 러시아등)을 비교했을때,어느것이 더 독재적이라고 생각되는가?

 

2) 독재는 한 개인, 또는 특정한 집단에 모든 의사결정 권한이 집중되고 그에 반하는 모든것을 배제하는, 제대로 된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절대권력을 뜻한다. 

 

3) 독재는 특정한 정치체제에 종속되는 개념이 아니다. 왕정에서도, 귀족과두제에서도, 공산주의 민주집중제에서도, 현대의 민주주의 모두에서 독재가 일어날 수 있다.

 

3-1) 반대로, 정치체제 자체는 독재적이고 반민주적이지만, 의사결정과정 자체는 민주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조선의 정치체제의 경우 국왕이 통치하는 국가이나 온갖 견제장치가 덕지덕지 붙어 독단적인 의사결정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3-2) 이는 후대 붕당정치와 세도정치를  거치며 붕괴되고, 조선 멸망의 한 원인이 된다.

 

 

 

4) 최초의 공화정-현대 민주주의의 시초라 불리는-아테네의 민주정은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와 함께 화려하게 꽃피웠으나 끝끝내 참주정, 다수의 시민들에 의한 중우정으로 타락한다.

 

4-1) 첨언하자면, 애초에 아테네등 그리스 폴리스들은 왕정, 귀족정을 거쳐 직접민주주의로 이행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 민주정은 참주정에 가까웠는데, 공화정 초기에는 귀족들에 맞서 평민들을 대변하는 참주들의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전쟁 즈음 시민들의 정치참여와 경제호황으로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이 이루어지나,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이후 그리스 폴리스들이 몰락하자 다시 참주정으로 퇴행한다.

 

4-2) 물론 참주들은 부패한 귀족에 맞서 평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등이 지적했듯이 이들은 자신과 친족들의 축재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국내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외국 용병들에 의존했다.

 

 

5) 이후 로마제정이후 자취를 감춘 공화정은 중세를 지나 근대에 들어서 근대 자유민주주의로 다시 부활하고, 새로운 형태의 참주정, 독재정역시 등장한다.

 

 

 

6) 19~20세기 등장한 근대의 독재정은 명확한 폭력의 형태, 즉 비밀경찰, 쿠데타, 무력테러와 정치깡패 집단등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한다.

 

6-1) 민주집중제와 프롤레탈리아 독재를 주장한 공산주의 볼세비키들, 권력이 집중을 내세운 이탈리아, 독일, 일본의 파시스트, 제 3세계 국가들에게서 자주 벌어지는 쿠데타를 통한 군부독재등이 예시이다.

 

6-2) 이런 형태의 독재는 구분하기도 쉽고, 눈에 띄는 직접적인 폭력을 동원한다. 때문에 쉽게 반발에 부딫히고,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이 증명된 현대에 이르러 정당성을 잃고 몰락해가는 정치체제이다. 21세기 제대로된 선거가 치뤄지고,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서 이런형태의 독재는 점차 찾아보기 힘들게 될것이다.

 

 

 

 

7) 현대에 이르러 독재자들은 좀더 세련된 방식을 택했는데 이를 포퓰리즘이라 칭한다. 

 

7-1) 현대 포퓰리즘을 내세우는 포퓰리스트들은 더이상 직접적인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열성적 지지자들, 자신의 광신도들을 대거 동원하여 낮은단계의 폭력을 일상적으로 동원,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반대파의 입을 막는다.

 

7-2) 이를 위해 윤리, 사법체계의 파괴, 폭력적 행위의 정당화등의 행위를 일삼는다. 대개 합법의 선에서 이루어지기에 눈치채기가 다소 어려울 수 있다.

 

7-3) 지지자들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은 지지자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척결해야 할 "악의무리"를 지정할 것이다. 적과 아군의 경계선을 극단화한다. 그것은 국적일 수도, 인종일 수도, 성별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은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한다.

 

 

7-4) 포퓰리스트들은 언뜻 민주적으로 보일지언정 실상은 다르다. 입으로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나 누구보다 자신들의 탐욕과 사리사욕에 민감하다.

 

 

7-5) 국민들-정확히는 지지자들-의 의지를 "지나치게" 존중한다. 간접민주정체의 정치인은 선출된 권력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의 전문성을 활용하기에 가치있는것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일반 국민들은 다소 비현실적이거나 근시안적인 시각을 보일때가 종종 있는데, 진정성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를 설득하고 개선해야지, 이에 끌려 다녀서는 안된다. 이런 정치인은 국가나 국민의 이익보다 지지율을 더욱 중요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민주정은 장점을 잃고 중우정으로 전락한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한 말이 있지 않은가

 

 

"정치가는 국민보다 딱 반보 앞서나가야 한다"

 

 

 

 

 

 

8) 좌우를 막론하고 현대의 포퓰리스트들의 공통점을 짚어보자면

 

 

 

8-1) 표현의 자유를 파괴한다. 이들은 대개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표현을 억압하고 남의 입을 막을 구실을 찾는다. 그게 도덕성이 될수도, 누군가가 불쾌하단 이유가 될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이 정의의 수호자가 되어 적대자의 비판을 억압할 권리를 가지게 의도한다.

 

잊지말자. 표현의 자유는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아군의 발언에는 누구나 관대하고, 적의 발언은 누구에게나 불쾌하다. 표현의 자유는 적의 발언에 반박할 기회를 줄 뿐이다.

 

 

 

8-2) "합법적"인 "최대한"의 권한행사. 예를 들어보자. 많은 나라에서 법무부 장관은 검찰조직의 인사권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는 국가는 결코 자유민주주의로 남을 수 없다. 합법적으로 이 권한을 무한히 사용한다면 검찰은 장관과 그 장관을 임명한 행정부수반의 시종이 될 뿐이다.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의회와 행정부가 내각 불신임과 의회해산을 남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남발한다면? 기억하기 바란다. 로마 공화정은 원로원이 "합법적"으로 최종권고를 발호한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8-3) 오만과 독선.

 

헌법은 모호하고, 법률은 해석의 여지가 다분하므로 그것을 구현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예를들어 대부분의 헌법에는 자유, 평등 두가지 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있다.

 

자유란 무엇을 말하는가? 법으로부터의 자유인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어떤 사람의 자유로운 행동을 누군가는 자유라 칭하지만 누군가는 방종이라 부른다.

 

평등은 더더욱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누군가는 공정한 기회를, 누군가에게는 모든것으로부터의 선택의 자유를, -모든 직업이 동등한 대가를 받고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공산주의자에게는 생산수당의 국유화를 의미한다.

 

무엇이 평등인가? 법은 이것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았다.

 

문제는 누군가-포퓰리스트들-가 이것을 독소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경우이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역사적인 사례로부터 대략적이나마, 구분하고 판단할 수 있다.

 

 

 

 

8-4) 관용의 부재, 갈등의 극대화

 

달리는 기차 위에는 중립이 없다.  갑자기 이 소리가 왜 나오냐?

 

한가지 가정을 해보자. 어떤 사회에서 갈등이 극대화 되었다. 

 

A라는 집단이 B라는 집단을 규정하고 우리나라는 B집단이 A집단을 착취하는 억압된 사회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후속조치-적극적 우대정책, 누진적 세금, 복지 정책, 범죄처벌에서의 차등-등을 주장할 것이고, 이는 당연히 B라고 낙인찍힌 개인들에게는 위협이 된다. 당연히 이들 또한 B라는 집단으로 뭉치게 될것이고 그 중간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조금 더 지나면 민주정은 토론을 통한 합리적 의사결정의 장이 아닌 적대적인 두 집단간의 세력대결, 머릿수를 앞세운 투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여기에서 이기는것은 좀더 합리적인 집단도 더 정의로운 가치도 아니다. (정의라는 개념은 개인적으로 비선호하지만 예시를 들어본다)

 

그냥 더 머릿수가 많고 힘있는 집단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집권시킬것이고, 그 대표자는 오로지 자신들의 집단의 이권만을 챙기거나 추후 정치적 보복을 방지하기 위해 권력에 탐닉하고, 친위대를 모으고 민주적 절차를 파괴하러 들것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이들을 "포퓰리스트"라 부른다. 이런 정치를 "포퓰리즘"이라 부르고.

 

 

 

8-5) 민주정의 가치는 합리적 근거를 가진 토론과 의사결정, 선거라는 비폭력적 수단을 통한 갈등의 합리적 해소에 있다.

 

 

포퓰리즘은 정확히 반대로 만든다.

 

 

 

 

 

 

9) 그렇다면 이러한 독재들, 포퓰리즘을 포함한 과거, 현대, 미래의 민주주의의 위협을 막고자 한다면, 현대의 자유민주주의가 미래에도 존속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민주주의와 독재는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개인적인 사견으로 몇가지 적어 보았다.

 

 

9-1) 투표를 한다고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행정, 입법, 사법부가 철저하게 분리되고, 각 정부부처가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개인이 정치 사상과 정치적 신념을 이유로, 공적, 문화적으로 최대한 탄압받지 아니하며,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최소한도로 침해할때가 자유민주주의라고 정의된다.

 

9-2) 어떠한 권력자가, 직접적, 간접적으로 검찰, 경찰등 수사권을 통제하고 공무원의 불만을 억누르며 거대 여당이나 정치깡패등 여러 합법적, 비합법적 수단을 통해 마음대로 입법을 할 수 있으며, 법관 임명권과 관영 언론등으로 법원의 판결에도 간접적으로 개입한다면 그건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를 하지만, 더이상 우리가 아는 의미의 민주주의는 아닌,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특권 정치계급이 생겨나는 그런 사회다.

 

 

 

9-3) 현대 점차적으로 정치가 종교화되어가는 중이다. 과거 종교는 사회문화적으로 개인의 삶에 깊숙히 개입했고 사실상 현대 정치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합리주의가 널리 퍼진 현대에서는 종교대신 정치가 들어섰고 이는 현대판 광신도, 근본주의자를 대거 양산하고 있다. 우리는 종교전쟁을 통해 광신도의 위험을 알고있다.

 

추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자기확신에 차 정의를 부르짖는 정치적 광신도를 경계하라.

 

 

9-4) 게슈타포등 비밀경찰이나 직접적인 검열은 현대 트렌드에 맞지않는 구시대적 탄압방식이다.

 

현대 포퓰리즘, 독재자의 트렌드는 소수의 광신도들을 동원하여 인터넷공간, 현실의 문화예술계에서 미리미리 낮은단계의 폭력을 행사함으로서 불만의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위력을 행사하여 세를 과시한다. 권력은 사람들이 권력자라고 믿는 데에서 나오므로.

 

광신적 지지자들을 대거 동원하여 반대파를 사회문화적으로 말살시키고 제대로 된 의견을 표출하지 못하게 낙인찍는다면 그것은 비민주적이고, 현대적 비밀경찰에 불과하다. 투쟁을 외치며, 악과의 투쟁을 말하고 확신에 차 정의를 부르짖는 정치인을 배제하라.

 

 

9-5) 아주 간단한 구별법이 하나 있다. 자코뱅과 볼세비키, 파시스트등 구시대의 독재자들부터 현대의 포퓰리스트들의 공통점이 한가지 있다면 이들은 모호한 정의를 내세우고, 자신들과 구분되는 악의집단을 지정한뒤 지지자들을 향해"정의를 위한 투쟁"을 내세운다.

 

상대집단이 선제공격을 가했으므로 다소의 폭력은 용인되며, (그것이 실재이든 조작된 주장이든) 자신들의 도덕적 흠결은 상대방도 똑같이 나쁘므로 무시된다. 강렬한 피해의식과 집단이기주의야말로 이들의 본질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정의의 최전선에 선 용사라고 여기기에 누구보다 오만하며, 일체의 타협을 거부한다. 절대로 사과하지 않으며, 악의 집단과는 대화도, 타협도, 협상 또한 거부한다. 오직 무한한 투쟁과 모호한 정의만이 존재할 뿐.

 

투쟁과 갈등이야말로 이들의 먹잇감이며 지지세력을 모으는 독재자들의 방식이다.

 

반대로 말하면, 사과를 하고, 경쟁자와 타협하고, 잘못된 일을 자신의 책임이라 인정하는 그런 정치인은 독재자일 확률이 낮다.

 

 

9-6)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정치인은 찍지 마라

 

어떤 정치인의 발언은 불쾌할수도, 기분나쁜 말일수도 있다. 다만 그냥 언론기사만 보고 판단하지말고 한번 더 고민해라.국회 의사록도 한번 뒤져보고, 인터넷에 발언 전문도 검색해 보아라.

 

좋은 부모라면, 선생님이라면 절대 아이에게 칭찬만 해주지 않는다. 좋은 친구라면 친구의 단점 또한 지적해 줄것이다. 지지율 하락을 감수하고 국민에게 쓴소리를 하는 정치인은 꽤 좋은 정치인일 확률이 있다. 물론 그냥 막말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듣기 좋은말만 하는 정치인은 경계해라. 이건 확실하다.

 

일상생활에서 당신에게 아부하고, 당신이 듣고싶어하는 말만 하는자들은 보통 사기꾼이거나 아첨꾼이다. 당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다.

 

 

9-7)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정치인이라도, 그 개인에게 모든것이 집중된다면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다. 민주정이 독재를 막는 원리는 권력을 분산하고 또 나누어서 그것을 행사하는 과정에 이중삼중 안전장치를 거는 것이다,

 

9-8) 민주정은 원래 답답하다. 이중삼중으로 이루어진 법적 절차와 안전장치를 파고나가다 보면 느리고 비효율적이게 보이기 마련이다.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지지자라면, 보다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온다. 비합리적인 반대파를 찍어누르고 권력으로 정의를 실현하고픈 그런 유혹.

 

슬프게도, 사람은 다 똑같고 복수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당신(들)이 그것을 행하는 순간, 상대파 또한 "당신이 끔찍하게 생각하는 정책"을 과격하고 독선적으로 처리할 이유가 생긴다. 보복이 몇차례 오가면 민주정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민주정은 상호 존중과 관용의 체제이다. 

 

 

 

 

 

Posted by 합리적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