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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09 창작물의 정치적 올바름(1)-정의의 의무화
창작물에 대하여2020. 10. 9. 19:41

201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문화예술계에 불어오는 바람이 하나 있다.

 

 

 

"정치적 올바름"

 

 

 

창작물의 정치적 올바름이란, 일반적으로 차별받거나 사회적 약자라고 여겨지는 정체성들이 창작물에서 일정 비중 이상을 차지해야 하며 조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정체성들은 동성애자, 여성, 유색인종, 젠더퀴어등을 뜻한다. 정치적으로 신좌파와 연관이 깊으며, 따라서 페미니즘, 환경운동, 채식주의, LGBT등과 궤를 같이한다. 전통적으로 문화예술계에는 좌파들이 많았으며, 곧 신좌파적 개념인 정치적 올바름 역시 창작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수많은 창작물들에서 이러한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캐릭터가 "여성"인것을 강조하고, 여성서사를 논하고.. 모든 직업마다 일정 비율로 유색인종을 집어넣고, 캐릭터중 몇몇이 갑자기 동성애자로 변하고.....

 

또한 기존에 존재하던 창작물들중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작품들에 대한 공격도 병행되었다. 특정 만화가 인종차별적이다, 특정 작가가 여성혐오적 발언을 했다, 특정 가사가 흑인을 모독했다....

 

 

 

이 파도는 할리우드를 휩쓸고 서구사회를 덮친뒤 마침내 한국에까지 밀어 닥쳤다.

 

많은 작가들은 정치적 올바름를 반영한 작품이야말로 새시대에 발맞춘 세련된 방식이라 생각하고, 거리낌없이 이를 수용한다. 사실 좀 더 과거로 돌려보자면, 이러한 소수자, 약자를(또는 그렇다 여겨지는) 조명하는 작품들은 깨어있고 세련된 작품이라 칭송받았다. 당차고 자주적인 여성캐릭터는 드물었기에 신선했고, 세련되었으며, 진보적인 작품이라 여겨졌다.

 

화이트워싱이 문제되던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 흑인 배우가 발붙이는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매카시즘의 광풍이 휩쓸던 1950년대 미국에서 조금이라도 "공산주의적"인 발언을 한 배우는 영화계에서 배제당했다. 2차대전 이후 문화예술계의 역사는 정치적 올바름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2010년대 이후 이 "정치적 올바름"이란것이 신좌파의 득세와 함께 거의 범람하다시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서사나 캐릭터, 개연성은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 중요한것은 의도이며, 정치적 올바름의 정의로움을 얼마나 잘 담아냈느냐가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작품이라기보다는 프로파간다의 방식이다.

 

가능한 많은 여성, 유색인종, 동성애자를 출연시키고, 정의와 도덕을 담아낸뒤 인종차별반대를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원론적으로는 옳다. 원론적으로는. 공산주의도 원론적으로는 옳은 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창작물이 재미없다거나 비판하는 목소리는 모두 차별과 혐오의 결과물이라 몰아붙이는 행태는, 뻔하디 뻔한 스토리와 개연성을 정치권력으로 덮으려는 얄팍함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전무한 상태로 독자를 조롱하는 오만함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심지어 추악하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보자. 작품성과는 별개로, 창작물에는 다양한 주제의식이 공존한다. 좌파들은 창작물에는 응당 소수자를 존중하는 주제의식이 들어가야 한다 주장한다. 피해의식 강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서사야말로 진정한 창작물의 극한이라 주장할 것이다. 지극히 편협한 시각이다. 고작 소수자 따위만이 창작물의 전부인가.

 

모든 창작물이 여성의 이야기를, 소수자의 이야기를 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그것을 하지 않았다고 열등한 창작물이 아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여성서사건(애초에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여성서사라는 개념 자체도 극도로 모호하지만) 인종차별 이야기건 그냥 주제중 하나이며 특별히 대접받아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주제의식의 유무나 종류 자체로는 어떠한 작품성도 유발되지 않는다. 그것이 전에 시도된 적 없는 신선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희소성이 있겠으나, 요즘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작품들이 부족하던가? 넘쳐나서 문제지.

 

 

 

 

시리아 내전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재민과 군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을때, 그것이 페미니즘 소설보다 열등한 작품이 되는가. 아프리카 소년병들의 이야기는? 세종대왕의 이야기나 문익점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냈을때 그 주제의식이 블랙팬서보다 못할까. 82년생 김지영보다 못할까.

 

소수자의 목소리만이 정의는 아니다. 전쟁도, 평화도, 범죄 수사도, 직업에 대한 존중과 가족애 역시 충분히 좋은 주제의식이다. 

 

아예 주제의식이 없는 작품들도 있지 않나. 순수하게 즐거움, 유머만을 목적으로 하는 만화들. 어떤 작가가 단순히 독자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작품을 만든다면, 표면적인 주제의식이 희박한 이 작품은 작품성이 떨어지게 되는가? 절대 아니다. 창작물의 다양성이란 특정 사상을 남에게 박아넣는 것이 아니다. 뭐가 되었던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다양성이다. 명량만화건 다큐멘터리건 동등하게 존중받는 것이(개인 취향은 별개로 하고서도) 평등이다. 주제의식 따위로 남의 창작물을 규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황당하게도 최근 많은 작가들, 작가 지망생들은 위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대학을 다녔던 내 경험으로는, 많은 학우들이 창작물의 정치적 올바름, 소수자 존중, 페미니즘적 시각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다. 예술계가 좌파 많은것도 알고, 저런 주제의식 쓴다고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단순히 PC적인 것을 넘어 배타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띄니 문제이다. 작가지망생들중 상당수가 트페미이고, 나머지도 대개 이들에 강하게 동조한다. 이들은 소수자를 위한 창작물 이외의 모든것들을 용납하지 않는다.(그 소수자의 정의 또한 자신들이 규정한다) 숫자의 폭력을 앞세워서. 반대파의 목소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묻혀버리기 일쑤이다. 걱정인 것은, 이들이 미래의 편집자이며, 플랫폼 담당자가 될것이고, 작가들도 이들중에서 나올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이 왜 이런 사상을 갖게 되었을까. 작가란 어떤 집단인가. 창작물의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감정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집단이다. 창작물은 감정의 언어이다. 이성의 언어를 쓰고 싶다면 논문을 써야한다. 

 

내 사견으로는, 그렇기에 작가들은 감성적이다. 감성적이라는게 유약하다거나 격정적이라는것이 아니다. 현실을 표현하는 대신 당위를 내세우고, 스토리 자체가 도덕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그러한 내용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것이다.

 

 

 

 

 

창작물의 주인공들을 생각해보자. 대개 어떠한 악이 존재하고, 주인공은 악과 싸우며 절망하고 고난을 겪으나 끝끝내 승리하고 보상을 누리는, 아주 간단한 서사를 가진다. 이 용사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이 나올까. 주인공이 노력끝에  그 결실을 맺고,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고, 누가 보기에도 죽어 마땅한 "악"을 처단하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영웅이 된다. 독자들은 이를 보며 감동을 받는다. 대부분의 창작물들은 그렇다. 배드엔딩이나 보다 현실적인 소재도 존재하나, 결국 독자들의 어떠한 감정 변화를 유도하는것은 마찬가지이다. 

 

시간의 상대성과 광속의 절대성을 설파하거나, 뉴턴 물리법칙의 한계를 지적하는 뭐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도 존재하지만, 그들 역시 캐릭터와 연출이라는 필터를 거치고, 창작물은 정보전달 측면에서는 순수 설명문에 못 미친다. 계속 말하지만, 창작물은 감정의 언어이다. 감정으로 독자를 설득한다.

 

이게 현대 신좌파적 정치적 올바름-페미니즘과 결합했을때 파멸적인 결과가 나타난다.

 

 

 

 

 

신좌파들은 누구인가. 페미니스트, LGBT,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 인권운동가.... 이들은 누구보다 감정적이며, 가장 소리높여 정의를 외친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받은 소수자를 위한다는 정의를 내세운다. 억압받고 소외받던 보잘것 없는 주인공(소수자들)이, 어떠한 계기(페미니즘,인권단체)로 부당함을 깨닫고, 악한 적과 싸워(차별주의자들), 혁명으로 적을 무찌르고 정의를 이룬다는, 창작물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기에 창작자들은 이 사상에 강하게 끌린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거나, 이들의 모순점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사로잡힐 것이다. 언뜻보기에 이 사상들은 문제가 없으므로, 소수의 극단적인 이들만 배제한다면(트페미등) 정의로운 사회(차별이 없는)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보인다.

 

현대 많은 창작자들은, 창작물에 다양한 인종을 의무적으로 집어넣고, 동성애자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녹여내려 노력한다. 소수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주제는 범람하다시피 한다. 억압받던 소수자가 깨달음을 얻고 차별주의자와 사회의 억압을 벗어 던지고 다른이들을 계몽시키는 내용은 이제 흔하기까지 하다.

 

좋다. 창작물에 대한 책임은 작가 개인에게 있고,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표현의 자유는 가능한 보장되어야 한다. 자기 만화나 소설에 어떤 주제의식을 넣고 어떤 캐릭터를 넣던 그건 작가 자신의 자유이다. 그에 대한 책임은 작가 개인에게 존재한다. 그것이 패널티일수도, 어드밴티지일수도 있다.

 

 

 

 

 

 

문제는 그를 넘어-그들에 동조하지 않는, 다시 말해 그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만화를 만드는 작가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이다. 어떤 작가들은 딱히 다양한 인종을 넣는데에 관심이 없고, 굳이 여성캐릭터를 자주적으로 만들지 않으며, 누군가는 동성애가 아닌 펑범한 이성애를 주제로 작품을 만든다. 그렇다면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가들이나 그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적극적으로 공격하며 배제하려 든다. "사회정의를 위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회 문제에 공정한 관심을 가지는가. 그들은 시리아 내전에 관심을 가졌는가? 아랍의 봄 이후 발생한 시리아 내전으로 수백만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돈바스 전쟁은 어떤가, 아프리카 군벌들의 문제는? 그곳에서는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따위가 아닌 직접적인 폭력과 차별들이 발생한다. 제 3세계의 비참함은 선진국의 상상을 초월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 관심을 가질수 있을까.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자들은 모두 비열한자들인가. 자신의 관심사를 남에게 강요하는 행태는 극좌적인 오만함일 뿐이다.

 

기억하기 바란다. 1990년대 한국의 만화검열을 주도한 단체는 YWCA였고, 기독교 페미니즘 성향을 띈 여성단체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웹툰을 공격하는 중이다.

 

 

 

2편에서 계속한다.

 

 

 

Posted by 합리적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