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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에 대하여2020. 10. 17. 13:16

RAPP(전러시아 프롤레탈리아 작가협회, Rossiyskaya Assotsiatsiya Proletarskikh Pisateley)는 소련에서 존재했던 단체이다.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사회민주노동당(후일의 공산당)은 도시 노동자와 군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농촌에서는 사회혁명당이 우세했다. 공산당의 집단농장화를 농민들은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제헌의회에서 사회혁명당이 과반을 차지하자 레닌은 부르주아의 의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며 의회를 해산한뒤 소비에트의 볼셰비키들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공산당 민주집중제를 실시한다.

 

비밀경찰 체카(반혁명 공작 대처를 위한 특별국가위원회)가 반대파를 숙청하고 파업을 일으킨 주민들을 강물에 던져버린다. KGB의 전신인 체카는 고문도 서슴치 않았다. 니콜라이 일가는 권총탄을 맞고 황야에 암매장된다. 소비에트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맨셰비키와 온건 사회주의자들 또한 계급의 적이라 낙인찍혀 숙청된다. 혁명 이전 차르의 비밀경찰은 재판없이 연간 수십명을 죽였다. 1918~1919년 체카는 수만명을 학살했다.

 

반혁명의 공포에 쫓기는 볼셰비키들은 이내 출판, 즉 문학과 연극등 창작물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작이다.

 

 

 

여기에 전러시아 프롤레탈리아 작가협회가 중심이 된다. 아베르바흐가 진두지휘하는 이 단체는 노동자의 이름아래 모든 출판물을 검열한다. 모든 창작물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요된다. 톨스토이와 도프도예스키의 소설은 봉건시대의 잔재로 격하된다. 새시대의 걸맞는 노동자의 자세를 제시하고, 위대한 소비에트 공산당의 혁명을 찬양하는 작품만이 살아남았다. 우매한 민중을 계몽시키는 것이 예술의 의무였다. 모든 창작은 당 중앙위원회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에 있어서 올바르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묘사할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 그때 예술적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근로자를 사회주의정신에 있어서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시키는 과제와 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네이버 백과사전 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잡다한 수식어를 다 걷어내고 보자면 간단하다. 예술에는 그 자체를 뛰어넘는 사회적 의무가 존재한다. 고통받는 노동계급과 위대한 혁명을 위해 예술가들은 혁명에 봉사할 의무가 존재한다. 봉건사회와 부르주아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혁명을 이끄는 공산당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모든 창작물의 주를 이루어야 한다. 예술로서 민중을 세뇌 계몽해야 한다. 창작에 무지한 볼셰비키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며 위대한 저작들이라고 떠들어 댔다. 전체주의자들이 약자의 이름으로 예술에 통일성을 강요했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한게 으레 그렇듯 소련 문학계가 침체하는 결과를 낳는다.

 

 

 

 

어린시절 도프도예스키의 소설을 읽고 감명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2차대전 참전한 소련 여군들의 인터뷰를 엮어 책으로 만든다. 이를 출판하러 공산당에 가져가지만 반려된다. 이유가 황당했는데,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혁명을 위해 싸우는 위대한 공산당 간부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웃긴 건 현대 신좌파 페미니스트들은 이 책을 역사속 잊혀진 여성들을 조명한 위대한 소설이라 찬양한다. 같은걸 봐도 기준이 제멋대로이다. 더 어이없는건 작가는 딱히 페미니즘적인 생각으로 이 책을 쓰지 않았고, 러시아 공산당은 페미니즘의 수호자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 대혁명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휘두르는 홍위병들은 구시대적이고 봉건적인 잔재들을 쓸어 없앤다며 소설, 애니메이션, 영화, 경극을 파괴하고 공자묘를 도굴한다. 애니메이션 선진국이었던 중국은 몰락하고 일본이 동아시아 애니메이션을 선도한다. 마오의 아내 장칭이 앞장서 공격한 경극은 아예 초토화된다. 중국은 아직까지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은 도서 정리 사업으로 불건전한 작가들을 숙청하고 작품들을 불태운다. 노비를 부린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은 봉건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비판받는다. 남은것은 오직 조선린민의 수호자, 민족의 아바이, 혁명의 수뇌부이신 김일성 수령동지 뿐이었다.  같은 조선의 후예인 한국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북한과 공산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80년대 운동권들은 한국영화들이 지나치게 부르주아적이고 서구제국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며 비판한다. 예술은 응당 사회적 약자인 프롤레탈리아 노동계급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들이 정확히 무슨의미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예시를 들어보겠다.

 

 

 

 

 

 

디즈니 영화 "겨울왕국"의 사례를 보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엘사와 안나는 아렌델 왕국의 왕족이다. 봉건사회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두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둘의 입장만을 대변한다. 엘사는 선천적인 얼음마법으로 고통받고 안나는 사랑의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눈을 돌려보자. 아렌델 왕국에는 수많은 주민들이 살고있다. 과거 귀족들의 압제와 착취속에 고통받았던 봉건 농노들이다. 이들의 아픔과 고통에 비하면 엘사의 어려움은 한낱 어리광에 불과할 것이다. 엘사가 기근의 굶주림을 겪었는가, 아니면 신분사회의 유리장벽을 마주했는가. 여기서 이 영화가 프롤레탈리아를 외면하고 푸른피의 입장을 대변하는 구시대적인 부르주아 영화라는것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아렌델의 주민들은 왕족들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따른다. 얼음장수 크리스토프는 안나를 도와주는 영화의 남주인공 포지션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볼때 이는 노동계급에 대한 후안무치한 모욕이자 미국자본인 디즈니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보여준다. 중세 평민들이 왕과 귀족들을 진심으로 존경했을까. 권력을 가진 귀족들에게 평민들이 감히 맞설수 있었을까. 압제에 시달렸던 과거 평민들은 귀족들의 칼과 무력앞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실존하지 않는 영화 속 유토피아를 보고있자면 씁쓸할 뿐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아렌델의 주민들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안나와 엘사는 궁궐에서 살지만 평민들은 초라한 나무집에서 살아간다. 둘의 차이는 오직 신분뿐이다. 누구도 그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귀여운 캐릭터와 화려한 그래픽으로 포장한 겨울왕국은 신분제와 봉건사회를 미화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프와 스벤, 올라프를 표현해낸 방식 또한 제작진의 부르주아적 시각을 드러낸다. 이들은 철저한 엑스트라이며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 포지션에 머무른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다른 방식은 없었는가. 노동력을 타의적으로 착취당하는 가축 스벤과 온몸이 조각나도 여왕을 돕는 올라프.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주연들. 마치 과거 집안 하인들을 착취하며 한줌 자비를 베푼뒤 자신이 자비롭다 으스대는 귀족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 영화가 가장 성공적인 디즈니 영화중 하나이며, 엘사가 수많은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다는것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어린 소녀들이 엘사의 얼음드레스를 입고 우쭐해한다. 그 소녀들은 대다수가 프롤레탈리아 계급이며, 평생 저런 귀족적인 드레스를 입을일이 없을 텐데도. 보다 노동친화적인 영화가 필요하다. 더 이상 신분제를 미화하는 부르주아의 영화는 필없다. 보다 혁명적인 영화, 주인공이 노동계급인 영화, 세계시민들의 연대와 해방을 위해.

 

 

 

 

.....대충 이런 주장이다.

 

써놓고 보니 더욱 개소리같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실제 운동권들이 했던 주장이 저런거다. 대학 도서관에서 학생 운동권의 얇은 책 한권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90년대 한국 영화를 비판하며 했던 주장이 정확히 저런거였다. 영화에 등장하는게 다 양반, 장군, 공주, 왕자들이라고. 왜 펑범한 농민이나 노동자를 등장시키지 않냐고. 내 기억에 그 책이 출판된 연도가 96년도였나 그랬다. 제목은 기억이 안나지만.

 

저 논리로 따지면 영화 기생충은 프롤레탈리아 계급을 모욕한 영화이다. 부유한 부르주아에 비해 프롤레탈리아 노동계급은 약자이고 기택 가족을 이용해 약자를 모욕한 기생충은 반프롤레탈리아적이다. 지하실의 오근세를 이용해 노동계급간의 갈등을 보여주었다는 것에서 더더욱 그렇다. 노동계급간의 분열을 초래하니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어떤가. 주인공 고애신은 사대부의 영애이다. 말할것도 없는 부르주아이며, 하인을 부린다는 점에서 더더욱 악질적이다. 유진초이는 천민이었으나 신분질서에 순응해 혁명대신 군인의 길을 택했고 무력으로 미국정부와 자본주의를 비호한다.  쿠도 히나는 호텔을 운용하는 부르주아 여성이다. 오직 구동매만이 하층계급이지만 그조차 신분질서에 순응하고 같은 노동계급을 박해한다. 그 칼끝은 부르주아 계급을 향했어야 옳다.

 

영화가 무슨내용이고 작가가 얼마나 애정을 담아냈으며 개연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압제받는 노동계급, 그리고 혁명의 필요성과 공산주의의 위대함. 이 세가지를 얼마나 잘 담아내고 대중에게 전파하느냐만이 영화의 쓸모를 증명한다. 이 내용이 들어가지 않은 모든 창작물은 잠재적으로 부르주아적이거나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작품이다.

 

전체주의란 무엇인가. 파시즘을 설명할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개인에 우선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다를바 없었다. 계급은 개인에 우선한다. 작가의 표현의 자유따위 위대한 혁명앞에 무시되는것이다.

 

소련의 몰락과 함께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몰락한다. 소련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비판한 솔제니친은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는다. 미국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가 막대한 자본과 상업주의를 내세워 전세계를 휩쓸고, 자본의 그늘에서 다양한 작가주의 영화들이 자리를 잡았다. 더이상 검열과 전체주의의 광기가 창작물을 억압할 일은 없을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망령이 다시 돌아왔다. 공산주의가 노동자의 탈을 썼다면 이번에는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의 탈을 쓰고 나타났다. 불편할 자유라는 구호아래 창작물을 짓밟는 저들의 행태는 과거 볼셰비키들과 다를바 없다. 저들은 인권과 개인의 권리를 외치지만 실상은 여성과 소수자라는 집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립할 수 없는 집단주의자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자신들이 허락한 어항속의 자유이며 페미니스트들의 혐오에 대한 혐오는 자신들이 불편하거나 불쾌한 모든 것들이다. 저들은 말도안되는 주관적 기준으로 남의 창작물을 혐오로 규정한다. 패션왕의 봉지은이 아랫배에 조개를 올려놓고 깼다고? 그게 왜 여성혐오인가. 해산물 혐오일 수도 있지. 동물단체들은 뭐하고 있는가. 동물혐오이니 네이버 본사에 항의해야 한다. 

 

 

뭐 기안 84가 이상한짓 하는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신좌파들에게 혐오스럽지 않은 작품은 일정이상의 여성/동성애자/유색인종이 등장하고, 불평등과 혐오에 대항한 소수자가 압제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는 주제를 가지고, 우매한 대중에게 페미니즘과 신좌파의 위대함을 얼마나 잘 알려주는가, 대충 이런거다. 주어만 바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이들이 창작물을 검열할 권리를 가지면 일어날 결과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똑같을 것이다.

 

 

누군가가 불편하다고 창작물을 억압할 권리를 준다면 그 권리는 모든 대중이 공평하게 나눠갖지 않으며, 결코 공정하게 행사되지도 않는다. 일반 대중은 창작물을 일일히 찾아보고 판단할 시간을 갖지 않으며 그런데 별 관심도 없다. 소수의 광신도들, 소위 "꾼"들이 집단을 이루고 여론을 선동하면 그곳에 쉽게 휩쓸린다. 즉 실질적으로는 소수 권력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창작계 전체를 검열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정치인들과 연관이 있고,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창작물들이 이리저리 통제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표현의 자유는 당신이 남을 비판할 자유가 아니다.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자들이 당신을 욕하면 당신은 그에 대해 비판하고 반박할 권리만 있을뿐 그 발언을 틀어막는 것은 당신의 자유를 권력자들에게 저당잡히는것과 다를바 없다. 표현의 자유는 당신이 가장 증오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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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합리적으로 살자